1947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1회로 졸업하고 1958년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을 마친 1949년부터 46년간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순탁은 한국물리학회를 창설해 1972년 학회장에 취임했으며, 통계물리학회 월례모임을 주도하면서 한번도 모임에 빠지지 않고 제일 먼저 참석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론 분야를 전공했으면서도 실험 물리의 중요성을 강조해 학문이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려면 이론과 실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론에 치우쳐 있는 한국 물리학계에 새바람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1950년대에 잡지에 발표한 〈물리학자가 되는 길〉은 물리학 지망생들의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했으며, 그가 미시간대학교 유학시절에 발표한 〈조-유렌벡 방정식〉은 그를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올려놓기도 했다.
평소 온화한 성품과 선비다운 고고함을 잃지 않았던 그는 후학들의 사표로 손꼽혔으며 1974년부터 한...
생년월일: 1925. 1. 4 전남 승주(현 순천시) 주암리에서 죽천 조학종공과 함양박씨 월애여사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남.부인 고효석 여사와의 사이에서 2남 3녀(권국, 권희, 영신, 영희, 권중)를 둠.
학력
1937 서울 교동공립 보통학교 졸업
1942 경기 공립중학교를 졸업
1944 일본 제3고등학교를 졸업
1945 일본 교또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수학
1947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 과 졸업 이학사 (Physics)
1949 서울대학교 대학원 물리학과 졸업 이학석사 (Physics)
1958 미국 미시간 대학교 졸업 Ph.D. (Physics)
경력
1949-6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 과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 교무처 부처장, 문리과 대학 이학부장
1952-96 한국물리학회 창립 발기인, 회 원, 평의원, 부회장, 회장
1964-74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이 공대학장
1973-81 한국 원자력 연구소 이사, 부이 사장
1974-80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장
1980-83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1981-96 대한민국 학술원 정회원
1983-90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교 육대학원 원장
1995-96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원로회원
상훈
1960 녹조 근조 훈장 수훈
1965 대한민국 학술원상(저작상) 수상
1972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1986 성곡 학술문화상(자연과학부문) 수상
1990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1995 제5회 자랑스런 서울대인 선정
1996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저서
일반물리학, 양자역학, 고체물리학, 수리물리학, 통계역학 등 다수
조순탁 선생님에 대한 회고
필자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1955년에는 조순탁 선생님은 이미 미시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신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신입생인 필자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그것은 선생님이 물리학과 과지인 "물리학연구"에 떠나시면서 기고하신 "이론 물리학을 하는 길"이라는 몇 쪽 짜리 작은 글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의 물리학과 학생이었다면 누구라도 기억할 그 글은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글귀로 시작했는데 이론물리학을 하려면 필독하여야 할 물리학과 수학의 교과서들을 추천한 것이었다. 1학년 때 다까기 데이지의 "해석개론"을 위시하여 3학년에는 Whittacker & Watson "Modern Analysis"며 Courant Hilbert의 "수리물리" 등을 필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과 필자와의 인연은 이처럼 뵈옵기도 전에 깊이 맺어졌다. 3년 후 돌아오신 뒤에는 너무 지나친 요구였다고 철회하셨지만 그 글에서 추천하신 책들은 아직도 빛나는 불후의 고전들이다. 이어서 발간된 "물리학 연구"지에는 선생님의 미국에서의 연구생활의 편린을 담은 편지가 몇 회 실렸는데 자격시험을 어떻게 치르시고 어떤 성적을 내셨으며 그 결과로 강의 수강의무(course work)가 면제되었으며 박사논문 주제로 어떤 연구 과제를 받았는지 등 미국 대학에서 박사는 어떻게 하는가를 꽤 자세히 설명하는 글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 편지들에서 막연한 동경을 불러 일으켰고 또 희망에 가슴 부풀어 하였다. 필자가 4학년에 진학하자 처음으로 선생님을 뵈올 수 있었다. 그동안 물리학과 선생님은 관계에 나가시거나 (윤세원 교수) 외유 중이어서 (권녕대, 지창열 교수) 학과는 거의 비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 때에 선생님이 귀국하여 양자역학과 통계역학을 강의하셨는데 자습으로만 공부하던 우리에게 대학 강의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맛보게 해주셨다. 돌이켜 보면 반세기에 가까운 옛 일이건만 그 감동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선생님은 그 당시 종로구 원서동 한옥에 사셨는데 우리는 선생님이 좋아서 세배를 드린다는 등 핑계를 대고 몇 번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귀찮아 하시지도 않고 학문에 대해서, 미국 유학에 대해서, 또 인생에 대해서 오랜 시간 친절하게 상담을 해 주셨다.
필자가 미국에 가서도 통계역학을 꼭 전공하려고 결심하게 된 것은 바로 선생님의 강의에 매료되고 선생님이 좋아서 그 길을 따라 걸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뜻에서 선생님은 필자의 인생행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969년 필자가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에는 선생님은 서울대학을 떠나 새로 생긴 서강대학에 자리를 옮기신 다음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떠나시면서 비운 그 자리를 필자가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필자와 선생님과의 인연은 길고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고 하겠다.
모교 서울대학에 돌아온 후에도 자주 선생님을 찾아뵈웠는데 오랜 외국생활 때문에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문제가 생기면 불평도 하고 상담도 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은 아직도 젊고 철없는 필자의 투정에 위로해 주시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에는 이런 것이 있다. 필자가 무언가 한국의 불합리한 현실에 불만을 털어놓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토양이 다른 곳에 갖다 놓으면 살 수 없듯이 아무리 합리적인 생각이라 하여도 그 생각을 실현할 만한 환경과 여건이 되어 있지 않으면 이룰 수 없네. 먼저 그 꽃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바꿔 놓는 일이 순서일세." 혈기만 가득 찼던 필자에게 아주 좋은 조언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들어 비슷한 불평을 하는 학생이나 후배에게 같은 조언을 주고 한다.
1970년대 한국은 아직도 학문의 불모지였다. 교수의 수는 얼마 안되고 강의 부담은 엄청나고 연구비는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당시 한국에 통계역학을 전공하신 교수는 선생님을 빼고는 고려대학교의 강우형 선생님과 필자가 고작이었다. 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도 고립되어 있으면 학문적 활동이 침체되는 것을 일상 경험하는 바라 선생님은 함께 모여 서로 고무하며 토론하는 모임을 주선하셨다. 그것이 서강대학에서 시작한 수요 세미나이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 서강대학교 선생님 연구실에 모여 논문하나씩을 돌려 읽기로 한 것이다. 필자와 강우형 선생님 외에 선생님이 서울대학 박사과정에 남겨 놓으신 작고한 최철규 교수와 은퇴한 이경원 교수 등 모두 다섯이 서강대 수요세미나 멤버의 전부였다. 이 수요 세미나는 1974년 선생님이 원장으로 부임하신 홍능 한국과학원 원장실로 옮겨서 진행되었는데 막중한 행정 업무에도 불구하고 별로 거르는 일이 없이 이어져 갔다. 아마도 선생님은 이 수요세미나를 어떤 약속이나 모임보다 우선해서 시간표를 관리하신 것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님의 이 학문에 대한 열의에는 정말 고개 숙이게 된다. 후학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라 생각된다. 수요 세미나는 나중에 대우 통계물리 월례강연회로 발전되었는데 선생님은 이 모임에도 은퇴하신 후에도 건강이 허락하시는 한 참석하셨다.
작고하시기 몇 년 전 고대 엄정인 교수가 선생님과 강우형 교수와 필자를 잠실 어느 일식집에 초대하였다. 선생님이 사시는 역삼동 아파트는 필자의 집에 가는 길이라 함께 전철을 타고 선릉역에서 내려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조금 뒤떨어져 아파트 옹벽에 머리를 대고 서 계셨다. 쫓아가 어찌된 일인지 여쭈어 보니 숨이 막혀 걸을 수 없었는데 이제 회복되었으니 걱정말고 가보라고 하셨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심장 판막이상으로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것이 선생님의 투병생활의 시작이었다. 1995년 정월 세배를 갔을 때 선생님은 꽤 회복이 되신 듯 하였다. 그러나 그 때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뵙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필자는 그 해 여름 일년 기약으로 미국으로 떠났고 이듬해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세상을 떠나시기 며칠 전 엄정인 교수가 내게 전화로 귀뜸을 해주었다. 선생님이 며칠을 넘기실 수 없을 것 같으니 전화라도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마지막 목소리를 태평양을 넘어 전화선을 통하여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필자에게 안식년을 즐겁게 지내다 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며칠 뒤 선생님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미시간 대학에 유학하여 George E. Uhlenbeck 교수의 지도 하에 쓰신 논문은 "THE KINETIC THEORY OF PHENOMENA IN DENSE GAS"라는 제목인데 미시간 대학 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이래 한번도 달리 발표된 바 없다. 그러나 그 논문은 통계역학의 많은 단행본을 비롯하여 볼쯔만 방정식, 특히 고밀도 기체의 볼쯔만 방정식을 다루는 논문에서는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전설적인 고전적 논문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서는 학문의 불모지에 태어나 독학으로 물리학의 기초를 다졌고 30세의 나이에 유학하여 수강의무과목도 면제받고 만 3년 만에 이 논문을 완성하셨으니 그 천재성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선생님이 만약 귀국하지 않으시고 계속 미국에 머무시어 학문활동을 계속하셨다면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 생각해 보면 아쉬운 마음이다.
그러나 한편 한국 현대과학의 여명기에 태어나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또한 교육행정가로서 한국물리학 발전의 기틀을 다져 놓았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온화한 인품으로 후학의 사표가 되었다는 것은 꽃피우지 못한 학문적 성과보다 더 고귀하고 값지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으로 인해 많은 제자와 후학이 희망과 용기를 갖고 물리학의 길로 나섰고 미국 유학만 가면 박사학위를 받고 훌륭한 논문도 쉽게 쓸 수 있다는 희망과 동경을 갖게 해 주었다. 더욱이 한국의 작은 물리학계에서 우수한 통계역학그룹이 생겨날 수 있게 해준 것은 선생님이 뿌린 씨앗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번은 통계물리 월례강연회에서 호주의 Collin Thomson 교수가 강의한 일이 있었다. 강의 후 뒤풀이 자리에서 Thomson 교수가 볼쯔만의 학맥이 한국에 와 닿았다고 말한 일이 있다.
조순탁 선생님은 조-유렌벡 이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유렌벡 교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데 유렌벡 교수는 Eherenfest 교수의 수제자요 Ehrenfest 교수야말로 Boltzmann 직계이니 그 학맥이 한국에 온 것이라는 것이다. 조순탁 선생님으로 발원하여 오늘 날 한국 통계역학계가 이만큼 자라났으니 우리 모두가 볼쯔만의 제자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구철 (서울대학교 물리학부 교수)]
The Choh-Uhlenbeck Equation
통계물리학의 정의를 자유도가 많은 다체계의 거시적 물리현상들을 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입자들의 미시적 동역학으로부터 예측해 내고자 하는 시도라고 말할 때 크게 반대하는 의견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George E. Uhlenbeck 교수의 지도 아래 1958년에 완성된 고 조순탁 교수의 박사학위논문[S. T. Choh, "The Kinetic Theory of Phenomena in Dense Gases", Ph. D. thesis, University of Michigan (1958)]은 통계역학 연구, 좀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비평형통계역학의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지평을 이루고 있다.
조순탁 교수는 그의 학위논문에서 밀도가 그리 작지 않으며, 입자들 사이에 쌍으로 더해질 수 있는 짧은 영역의 반발력이 작용하는 비평형 기체계에서의 동역학적 축약과정을 연구하였다. 계가 비평형상태에 있다함은 측정대상인 거시적 물리량들이 시간과 공간적으로 균일하지 않고 아직 평형상태를 향해 완화과정을 거치고 있는 상태인데 [물론, 특수한 비평형상태로 정상상태도 있음], 외부교란의 충격에 대한 반응함수인 수송계수들이, 예를 들면 확산계수(Diffusion Coefficient), 점성도(Viscosity), 혹은 열전도도(Thermal Conductivity), 이 완화과정을 특정 지운다. 조순탁 교수의 연구는 고밀도 기체계에 적용되는 형식적 운동학이론(Kinetic Theory)의 틀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측정대상으로서 계의 수송성질들(Transport Properties)인 점성도와 열전도도를 밀도에 일차 비례하는 항까지 미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표현하였다. 이 연구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물리학자 Bogoliubov의 연구논문 [N. N. Bogoliubov, "Problems of a Dynamical Theory in Statistical Physics", J. Phys. USSR 10, 265 (1946)]의 연속선상에 있는데 Bogoliubov-Choh-Uhlenbeck 이론을 소개하기에 앞서 1946년 이전까지의 비평형통계역학의 상황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평형통계역학이론의 커다란 두 방법론들은 운동학이론과 시간상관함수(Time- Correlation Function)를 사용한 접근법인데 조순탁 교수는 운동학이론학파에 속한다. 운동학이론에서는 다체계의 동역학을 단일입자 분포함수(Single-Particle Distribution Function)를 사용해 기술하는데 이 양이 의미하는 바는, 계에 들어있는 입자의 숫자로 규격화시킬 경우, 주어진 시간에 특정위치에서 일정속도를 지닌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다. 계가 평형상태에 있을 때는 이 물리량이 잘 알려진 Maxwell-Boltzmann 분포함수로 주어지나 일반적인 비평형상태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고 이것을 결정하여야 한다. 흔히 운동학이론의 고전기라고 불리는 1946년 이전까지의 상황은 분포함수를 결정하는 이론이 일찍이 1872년에 유도된 Boltzmann 방정식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Boltzmann 방정식은 왼편에 계의 자유로운 전파에 의한 분포함수의 변화를 나타내는 식을 가지고 있고 오른편에는 충돌연산자(Collision Operator)로 불리는 충돌에 의한 분포함수의 변화를 기술하는 항을 포함하고 있다. Boltzmann 방정식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Boltzmann 방정식이 근본적으로 다체계의 복잡한 동역학을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이중충돌(Uncorrelated Binary Collisions)들에 의한 것만으로 근사하였기에 매우 희박한 기체에만 그 적용의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흔히 Molecular Chaotic Assumption으로 알려져 있음 또한, 이러한 상관관계의 무시는 속도상태 뿐만 아니라 위치상태에도 적용되어 충돌영역에서의 입자들의 위치차이의 무시로 말미암아 충돌전달(Collisional Transfer)효과가 고려되지 못함]. Boltzmann 방정식에 관해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Boltzmann 자신이 증명한 H-theorem을 통해 거시계의 비가역적 과정에 대해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Boltzmann 방정식과 거시적 수송성질들과의 연결고리는 계의 거시상태를 기술하는 물리량들이 분포함수의 속도모멘트들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좀 더 상세히 언급하면, 유체역학적 방정식들(Hydrodynamic Equations)은 다름 아닌 유체의 밀도, 운동량, 그리고 에너지에 관한 국소 보존법칙들인데 유체의 국소적 밀도, 운동량, 그리고 에너지는 이중충돌과정에서 미시적으로 보존되는 입자의 수, 운동량, 그리고 운동에너지의 분포함수에 대한 평균값으로 정의되며, 유체의 국소적 운동량과 에너지는 다름 아닌 유체의 흐름속도와 비평형온도를 가리킨다. Boltzmann 방정식을 사용해 수송계수들을 계산하는 체계적 방법은 1917년에 Chapman과 Enskog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이 이론은 일종의 섭동방법으로 입자의 자유행로를 유체역학변수들의 공간에 대해 변화하는 길이척도로 나눈 양을 작은 변수로 취급하여 분포함수와 유체역학적 방정식을 동시에 전개하는 과정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분포함수를 국소평형(Local Equilibrium) 근처에서 보존량들에 관한 그래디언트 전개해 형태로 얻게되는데, 그래디언트에 대해 가장 차수가 낮은 해에 해당하는 유체역학방정식이 이상적인 유체에 관한 Euler 방정식이고, 일차 비례하는 항에 대응하는 식이 Navier-Stokes 방정식이며, 다음 항이 해당하는 식이 Burnett 방정식으로 알려져 있다. 수송계수로서 점성도는 유체의 운동량다발(Momentum Flux)과 변형력텐서 사이의 비례상수이고, 열전도도는 열전달다발(Heat Flux)과 온도그레디언트 사이의 비례상수인데 Boltzmann 방정식을 사용하여 이들을 계산한 결과는 수송계수들이 온도에는 관련하지만 밀도에는 무관하게 주어진다.
이상이 간략하게 고찰한 1946년 이전까지의 운동학이론의 상황이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 운동학이론의 추세는 엄밀하게 유도되지 못한 Boltzmann 방정식을 미시적 동역학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고밀도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일반화된 운동학방정식(Kinetic Equation)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22년 Enskog이 충돌전달효과를 포함하는 일반화시킨 Boltzmann 방정식을 제안하였으나 Hard Sphere로 만들어진 유체에 국한된 시도였다 [그 결과는 Enskog 방정식으로 알려져 있음]. 이때, N. N. Bogoliubov의 다체계의 동역학적 축약이론이 그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러시아어로 적혀진 Bogoliubov의 원 논문이 영어로 번역되어 통계물리학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62년 E. K. Gora의 번역이 있은 후라는 점을 고려하면 Uhlenbeck 교수가 1954년 당시 대학원생으로서 연구를 시작하는 조순탁 교수에게 본인이 들어서 알고있는 Bogoliubov의 아이디어를 가르쳐주고 단지 구상만 잡혀있던 고밀도 기체에서의 운동학이론을 해결해 볼 것을 문제로 던져준 것으로 짐작된다.
조순탁 교수는 Bogoliubov 아이디어의 핵심인 다체계의 동역학적 완화과정에는 몇 개의 서로 다른 시간척도가 존재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내용의 핵심은 계를 준비하여 상호작용을 막 틀어준 초기단계(Initial Stage)에는 계의 동역학이 전체 입자를 모두 포함하는 다체분포함수(N-Particle Distribution Function)에 의해 기술되나, 그 다음은 충돌시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짧은 시간에 운동학적 단계(Kinetic Stage)로 전이하여 계의 동역학이 한 개의 입자와 관련된 분포함수에 의해 완전히 기술되고, 고차 분포함수들의 시간에 따른 변화는 단일입자에 관한 분포함수에 의해 결정되며, 마지막으로 가장 긴 시간척도로서 유체동역학적 단계(Hydrodynamic Stage)가 있어서 이 단계에서는 계의 동역학이 이중충돌과정에서 보존되는 양들과 관련된 다섯 개의 거시적 변수들, 즉 유체의 밀도, 흐름속도, 그리고 온도에 의해 완전하게 기술되어 분포함수와 고차 거시변수들은 이들의 범함수로 주어진다는 생각이다. 조순탁 교수는 우선 N개의 입자의 확률밀도함수의 동역학을 위상공간에서 기술하는 Liouville 방정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몇 개의 입자들의 무더기(Cluster)에 관한 축약분포함수(Reduced Distribution Function)들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기술하는, 오늘날 Bogoliubov-Born- Green-Kirkwood-Yvon (BBGKY) 위계(Hierarchy)방정식으로 알려진 동역학방정식들을 유도한다. 이 방정식들의 첫 번째 식은 단일입자 분포함수의 동역학을 기술하는데 오른편에 입자 두 개에 관한 축약분포함수를 포함하고 있고, 두 번째 식은 두 개 입자의 분포함수에 관한 동역학방정식인데 오른편 항에 세 개 입자의 축약분포함수를 포함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위계구조가 계속되기 때문에 조순탁 교수는 다체문제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난해한 문제인 닫기문제(Closure Problem)를 맞닥뜨리게 된다. 조순탁 교수는 이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BBGKY 위계방정식의 첫 번째 식에서 두 개의 입자에 관한 분포함수를 단일입자에 관한 분포함수의 범함수 형태로 구하는 방법을 택하였는데, 당시 평형통계역학에서 잘 알려져 있던 Virial 전개에 착안하여 비평형상태에 관한 체계적인 밀도전개를 수행하여 그러한 범함수를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단일입자 분포함수에 관해 닫혀진 운동학방정식을 유도하였는데 이 방정식이 바로 1958년에 제출된 조순탁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에 나타나고 있는 Choh-Uhlenbeck 방정식이다. Choh-Uhlenbeck 방정식은 밀도가 작지 않은 계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Boltzmann 방정식을 일반화시킨 최초의 체계적인 운동학방정식으로 운동학이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Choh-Uhlenbeck 방정식의 왼편은 Boltzmann 방정식의 것과 동일하나, 오른편의 충돌연산자는 밀도전개 형태로 주어지는데 첫 번째 항은 입자들 사이의 이중충돌로부터 기인하는 항이고 두 번째 항은 세 개의 입자들의 충돌로부터 기인하는 항이며 세 번째 항은 네 개의 입자들의 충돌에 의한 항으로 이러한 구조가 계속된다. 충돌연산자에서 가장 낮은 차수의 항은 Boltzmann 방정식에서와 같이 충돌이전에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이중충돌에 의한 동역학만 추출하고 있으나 Boltzmann 방정식에서 근사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충돌전달효과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다음 차수의 삼중충돌항은 세 개의 입자가 한 장소에서 만나 충돌하는 진정한 의미의 삼중충돌 뿐만 아니라 소위 오늘날 "고리충돌(Ring Collision)"로 알려진, 이전에 충돌한 적이 있는 입자들이 제 삼자의 개입에의 의해 다시 만나 이중충돌을 수행하는 서로 상관된 이중충돌효과들을 포함하고 있다. 조순탁 교수의 연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도된 Choh- Uhlenbeck 방정식을 사용하여 Bogoliubov의 동역학적 축약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유체역학적 단계의 계산을 수행했는데 저밀도의 계산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 분포함수에 관한 Chapman- Enskog 전개해를 구해내었다. 결과적으로 밀도가 작지 않은 3차원 기체의 점성도와 열전도도를, Boltzmann 방정식의 결과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밀도에 일차 비례하는 항들까지 계산할 수 있는 적분방정식으로 적혀지는 형식적 표현을 유도했다.
한편, 비평형통계역학의 또 다른 방법론인 시간상관함수방법론도 조순탁 교수가 한참 연구를 진행하던 비슷한 시기에 그 체계가 완성되었는데 다름 아닌 오늘날 Green-Kubo 형식으로 알려져 있는 이론체계이다. Green-Kubo 학파의 연구자들은 조순탁 교수의 학위논문결과를 접하고 이에 평행한 계산을 수행하여 유체의 수송계수들의 밀도전개에 관한 일차항에 대해 두 이론이 같은 결과를 도출함을 보이게 된다. 이후 고밀도 기체에서의 수송계수에 관한 Virial 전개는 비평형통계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이었는데 J. Weinstock, R. Goldman과 E. A. Freeman, 그리고 J. R. Dorfman과 E. G. D. Cohen 등에 의해 Bogoliubov-Choh-Uhlenbeck 이론의 충돌연산자에 관한 밀도전개가 수렴하지 않으며, 수송계수들에 관한 Virial 전개를 재규격화(Renormalization)한 결과 밀도에 대한 이차항의 계수가 로그함수적인 특이성(Singularity)을 갖음을 규명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이 비평형통계역학이 난해한 문제에 봉착해 있을 즈음 평형통계물리에 있어서는 임계현상과 상전이에 관한 연구들이 꽃을 피우게 되고 한동안 이후의 통계물리전반의 관심을 주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통계물리학의 지평이 넓어져 물리적 관심의 대상들과 이들을 연구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방법들도 매우 다양해졌지만 Choh-Uhlenbeck 방정식으로 요약되는 고 조순탁 교수의 업적은 비평형통계역학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교과서적인 모형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순탁 교수의 연구는 1960년대 이후 운동학이론의 흐름에 있어서 고리운동학이론(Ring Kinetic Theory)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는데, 조순탁 교수의 서거 일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1997년 6월 한국물리학회가 주관하여 개최했던 국제심포지움에서 M. H. Ernst [현대 운동학이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네덜란드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 중 한 사람임]는 조순탁 교수의 업적을 현대 운동학이론을 잉태한 요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M. H. Ernst, "Bogoliubov- Choh-Uhlenbeck Theory: Cradle of Modern Kinetic Theory" in Progress in Statistical Physics,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Statistical Physics in Memory of Professor Soon-Tahk Choh, edited by W. Sung et al. (World Scientific, Singapore, 1998)].
[김창섭 (전남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영원한 스승 조순탁 선생님
필자가 조순탁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과학원 입학을 위하여 구술시험을 치르던 날이었던 것 같다. 누구나 첫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그 훌륭한 인품이 내비쳐 보이는 멋진 풍채를 갖고 계셨는데 거기에 압도된 필자가 긴장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면서 차근차근 질문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부끄럽게도 필자가 썼던 학사학위 논문의 내용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아 주셨는데 그 때부터 선생님과의 오랜 인연의 시작이 예감되었다.
조순탁 선생님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거의 독학으로 물리학을 시작하신 분이다. 선생님은 서울대 물리학과의 제 1회 졸업생이신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당시의 서울대 물리학과에는 정식으로 물리학을 가르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다. 조 선생님은 일본의 교토대학에서 물리학과를 다니시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셨는데 교육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학생의 신분으로서 후배들을 가르쳐야 할 형편이셨다고 한다.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거의 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으신 후에는 바로 강단에 서시게 되었고 상당기간을 서울대학에서 가르치시다가 만학으로 유학 길에 오르시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남기신 "이론 물리학자가 되는 길" 이라는 글이 많은 후배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정작 선생님 자신도 미국유학에 오르시면서 꽤 걱정하셨던 것 같다. 나중에 회고하신 일이지만 그 동안 독학으로 공부해 오신 물리학이 과연 물리학인지 수학인지를 고민하셨는데 미국에 가서야 비로소 바른 방향으로 공부해 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선생님의 천재성은 미시간 대학 유학 시절에도 쉽게 나타났던 것 같다.
미시간 대학에 유학하여 George E. Uhlenbeck 교수의 지도 하에 쓰신 논문의 학문적 의미에 대해서는 김창섭 교수의 글에서 자세히 언급되겠지만 그 당시 반향은 대단하였다. 조 선생님의 지도 교수였던 Uhlenbeck 교수는 Ehrenfest의 수제자로서 그 당시 세계 통계 물리학계를 좌지우지 할 만큼 영향력 있던 대 학자였다. 조선생님께 주신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그 당시 Uhlenbeck 교수가 여기 저기 초청강연을 다닐 때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니 한번 도전해 볼만 하다고 후학들에게 강조하던 문제였다고 한다. 그런 어려운 과제를 한국에서 건너간지 얼마 안 되는 유학생에게 맡겼으니 참으로 촉망받는 학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개월 가량 이 문제를 파고들었는데 정작 진전이 없자 지도교수가 오히려 당황하더라고 한다. 그래서 좀 쉬운 문제를 해 보는 게 어떤가 하고 권유하여 플라스마와 관련된 문제를 연구하시던 중에 갑자기 힌트를 얻어 일사천리로 문제를 해결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 전쟁 직후 최빈국으로 여겨지던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평형 통계역학 분야의 숙제로 여겨지던 중요한 문제를 일사천리로 풀어내었으니 지도교수와 주위의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미국에 자리를 마련하여 줄 테니 같이 일하자는 지도교수의 제의를 뿌리치고 귀국하시게 된다. 고국의 물리학계와 가족들의 기다림을 이기지 못하신 것이다. 조선생님이 쓰신 박사논문은 정식으로 학술지에 게재된 적이 없지만 고밀도의 기체에 대한 비평형 통계역학 분야에서는 수없이 인용된 유명한 업적이 되었고 조선생님이 Uhlenbeck 교수를 떠난 후 그 빈자리를 채워 조선생님의 연구를 계승했던 당시의 젊은 학자들은 모두 통계물리학계의 대가들이 되었다.
그 대신 조선생님은 귀국하셔서 국내 물리학의 초석이 되셨다. 서울대, 서강대, 과학기술원, 한양대 등에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셨고, 서강대 이공대학장, 한국과학원 원장, 한국 물리학회 회장 등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참으로 많은 일을 하셨다. 이구철 교수님의 글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만 그 바쁜 중에도 통계물리학자들을 모아 세미나를 주선하시고 통계물리 월례강연회로 발전시키신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필자가 과학원의 학생이었을 때 선생님은 한국과학원 원장으로서 두 번의 임기를 마치시고 물리학과 평교수로 돌아 오셨을 때였다. 오십대 후반의 나이셨지만 통계역학 강의는 항상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선생님의 잘 알려진 연구 업적은 고밀도 기체의 비평형 통계역학 분야였지만 그것을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어느 한 부분 소홀함이 없는 치밀한 강의였다. 그 당시는 재규격화 군이론을 비롯하여 상전이와 임계현상에 대한 연구가 많은 학생들의 관심거리였는데 최근 연구동향과 함께 복잡하기로 소문난 아이징 모형의 이차원에서의 해까지 자세히 유도하여 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 이외에 고급 강의로서 비평형 통계역학의 새로운 이론들을 잘 정리하여 가르쳐 주셨는데 필자도 통계역학을 나중에 가르치게 되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선생님께서 얼마나 강의 준비에 정성을 다하셨는지가 실감이 나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끄러워지곤 한다. 이 강의 내용은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저술 중에도 학생들에게 원고 정리 등을 부탁하시는 일도 전혀 없어 언제 그 바쁜 와중에 그 많은 일을 하셨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그 당시 꽤 인기 있던 Radu Balescu 의 "Equilibrium and Nonequilibrium Statistical Physics"라는 교과서에 Choh- Uhlenbeck 방정식에 대하여 꽤 자세한 소개가 나와 있었는데 이것만해도 우리에게는 가슴을 부풀게 하는 일이었다. 국내 학자의 이름을 외국인이 쓴 교과서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지금도 보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물리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학을 가야한다는 것이 통념이었을 때인 만큼 이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이 유학을 떠나는 시기였지만 이제는 선생님께 의지하여 국내에서 학위를 해도 되겠다고 결심하고 선생님께 의논드렸는데 선생님은 쾌히 허락하여 주셨다. 선생님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처음 돌아오시어 계셨던 서울대학 시절은 본격적으로 국내의 대학원 과정이 궤도에 오르기 전이었으며 그 뒤 서강대학으로 옮기신 뒤에는 이공대학장으로, 또 과학원에서는 원장으로 일하셨으니 개인적으로 제자를 키우시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은 그 때가 처음이셨다. 오래 행정직에 계셨으니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학문생활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려웠을 법 한데 선생님은 그 당시의 통계 물리학의 최신 과제들을 잘 파악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그때 갓 외국에서 부임한 젊은 교수들이 새로 연구실을 일구는 것처럼 의욕적으로 연구생활을 하셨다. 그 당시 같이 수학하였던 동기들은 전주 우석대의 김기옥 교수, 인제대의 명연수 교수, 배재대의 임승환 박사, 기상청 수치예보과장 이우진 등이었는데 모두에게 상당히 다양한 연구 주제를 주셨다. 선생님은 손수 정리해 놓으신 연구 노트를 주제별로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는데 대개가 선생님께서 과학원 원장으로 그 바쁜 나날을 보내시면서 작성하신 것들이었다. 매주 한 번씩 갖는 연구실 세미나 시간은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다. 두세주 동안 밤새워 공부한 내용을 말씀드리면 선생님께서는 수식 한 줄 한 줄까지 찬찬히 그 자리에서 파악하시어 친절한 조언을 해 주셨으니 한치도 방심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선생님이셨지만 제자들을 항상 성숙한 학자들처럼 존중하여 주셨다. 선생님은 항상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격려하여 주셨다. "세계적인 학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능력은 자네들과 종이 한 장 차이네. 자네들이 한가지 문제를 붙잡고 끈기 있게 공부하면 그 종이 한 장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네." 그 당시에는 과연 그럴까 하는 회의도 갖곤 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그 후 필자의 연구생활에서 아무리 유명한 학자들을 만나더라도 주눅들지 않고 대등하게 교유할 수 있는 정신적 밑천이 되었다.
나이가 드셔도 식지 않는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때 미국에서 구하신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조그만 계산기를 갖고 계셨다. 어느 날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하셔서 그 조그만 계산기에 몬테 칼로 시뮬레이션을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논문으로 발표할 수 있는 수준의 데이터를 얻을 수는 없지만 이것으로도 기본이 되는 물리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셨다. 그 무렵 선생님의 연구실에 들리면 계산기에 달린 조그만 프린터에서 몬테 칼로 시뮬레이션의 결과가 또르륵 또르륵 프린트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그 당시에 한국에서 최고령의 프로그래머가 아니셨을까 싶다.
그런데 선생님께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진학한 필자와 동료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렸다. 당시 과학원과 KIST의 통합 시에 새로 만들어진 겸직규정을 소급 적용하여 문제삼고 덕이 없는 사람들이 선생님이 과학기술원을 떠나시도록 종용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신 군부의 위세를 업고 과학기술계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선생님은 자신보다도 제자들을 우선 걱정하셨지만 자신이 스스로 키워 놓은 과학기술원이 다치는 일이 될까보아 조용히 떠나겠다고 말씀하시고 학교를 옮기셨다. 제자들도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선생님이 열정적으로 다시 시작하신 연구생활도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만약 선생님이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하셨더라면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기셨을까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지만 필자는 선생님께 이런 일이 없었다면 만년에라도 미국에서 하셨던 일에 못잖은 훌륭한 업적을 다시 한번 이루실 수 있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런 연후에도 조선생님은 통계역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으셨다. 필자의 박사과정 중에도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찾아뵈면 언제나 좋은 지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 매일 옆에서 지도 받지 못하는 아쉬움을 다소나마 달랠 수 있었다. 은퇴하신 후에도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언제나 통계물리 월례 강연회와 물리학회의 통계물리분야 발표장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셔서 젊은 후학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셨다. 이런 선생님의 덕으로 한국의 통계물리 분야가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부끄럽지 않는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물리학회에 발표장 안에 보다 밖에 오히려 사람이 더 많은 모습을 흔히 보면서 선생님의 모습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 물리학회 주최로 1주기 추모 통계물리 국제학회가 있었다. 조직위원들 중 직접 제자는 필자 뿐이었지만 성우경 교수 등 여러분께서 열성적으로 수고하여 주셨다. 이 학회의 주 초청연사였던 네델란드의 Matthieu Ernst 교수는 "Bogoliubov Choh Uhlenbeck Theory: Cradle of Modern Kinetic Theory"라는 제목으로 조선생님을 기리는 특별 강연을 정성들여 준비하여 주었다. 이 내용은 World Scientific에서 출간된 학회 프로시딩에 출판되어 있다. 다른 초청연사였던 이스라엘의 Daniel Amit은 고별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번 학회에 참석하여 한국학자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고 작은 커뮤니티가 훌륭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프로페서 조가 살아 계셨다면 그는 자신이 초석을 쌓은 한국의 통계물리학계의 발전을 세계에 당당히 자랑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